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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자끄 데리다 <해체>

by 더쇼트 2009. 8. 28.
해체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자크 데리다 (문예출판사,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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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철학의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남자, 해체주의 철학자 자끄 데리다는 철학, 언어학, 문학, 정신분석학 등 거의 모든 분야에 비판을 가하고 해체를 시도하고자 했다. <해체>는 그러한 데리다의 도전적인 논문들을 모아 만들어진 것이다. 데리다는 이 논문들을 통해 소쉬르, 라캉, 훗설, 헤겔, 하이데거, 칸트 등등 이름만 들어도 하품 부터 나오는 기라성 같은 학자들의 이론들에 대한 비판 작업을 시작한다. 이들을 비판하기 위해는 그들의 이론에 대해 완벽에 가까운 이해가 필요했을 터. 이 수많은 '본좌'들을 비판하기 시작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방대한 지식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책 속 군데군데에서 보여지는 단어의 중의적 의미를 이용한 언의유희는 혀를 내두르게 한다. 자유자재로 독어, 불어, 영어를 구사하면서 사상전달과 동시에 언어유희까지 생각한 그의 단어 선택은 탁월한 언어능력을 지녔음을 시사한다.

이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데리다가 비판한 소쉬르, 라캉, 훗설, 프로이트, 칸트, 헤겔, 하이데거 등등의 텍스트부터 읽는 것이 필요하다. 데리다는 위의 사상가들이 사용한 단어와 개념 하나하나를 심도있게 비판하고 있기에 그들이 사용한 개념들과 그 의미에 대해 먼저 파악하지 않고 이 책을 읽는다면 그저 말장난하는 것 처럼 보일 수도 있고, 읽는 도중에 논점을 놓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비록 이 책을 편역한 사람은 '처음 읽는 사람들도 쉽게 읽을 수 있게'라고 썼으나, 아마도 편역자는 '처음 읽는 사람들'이란 표현을 '갓 데리다에 입문한 철학 전공자'라고 염두해두고 쓴 듯 하다.

데리다 사상의 출발점을 찾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언어학자 소쉬르가 지대한 공헌을 했음은 사실이다. 소쉬르는 언어에서 어떤 단어가 생성될 때에 글자(기표)와 의미(기의)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 관계가 없을 뿐이라고 말한다. '나무'가 '나무'인 이유는 다른 단어들, 즉 '바위', '돌', '물'과의 차이에 의해 생겨난 것일 뿐이다. 따라서 누군가 '나는 어제 큰 나무를 봤어.'라고 했을 때 우리는 그 화자가 언급한, 그 화자가 보았던 그 '나무'의 실체에 절대 도달할 수 없다.

데리다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출발한다. 다만 소쉬르는 한 단어에 대한 의미가 한 번 정해지면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으나 데리다는 이 의미조차 변한다고 보았다. 전통적으로 말은 글보다 우월하다는 사상, 말은 글보다 먼저 있었으며, 말은 순수하고, 글은 말을 왜곡시킬 뿐이라는 사상은 저 먼 플라톤으로부터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데리다는 말도 언어의 구조 속에서 탄생할 뿐이기에 결국 말과 글은 같다고 본다. 즉, 데리다에게 있어서 기표와 기의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글의 기원이 말이 아니라면 언어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 데리다는 '차연(differance, 데페랑스)'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차연의 개념은 이 데리다의 논문 모음집을 관통하는 개념이다(사실 개념이라는 단어도 부적합하다. 데리다는 '차연'이 개념도 존재도 아니라고 책에서 밝히고 있다).'차이(difference, 데페랑스)'라는 말은 공간성만을 지니는데 반해 '차연'은 공간성을 포함하여 시간성을 내포하고 있다. 즉 차이는 이것과 저것의 구별을 가능하게 해 주는데에 불과하지만 차연은 하나의 대상이라 할지라도 시간에 따른 변화를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 차연은 우리에게 완벽한 논리의 불가능성을 시사해 주고 있다. 이것은 곧 철학에 대한 회의이다. 언어는 시간이 지나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므로, 언어란 은유에 불과하고, 결국 남는 것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결코 해석할 수 없는 텍스트들만이 남게 된다. 따라서 절대적인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책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자연스럽게 데리다의 사상은 신학에 도전장을 내밀게 된다. 우리는 신을 믿는다는 것이 가능한가? 더 좁혀서 기독교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믿고 사유하는 것이 가능한가? 데리다를 연구한 에드워드의 논문에 의하면 신이 설 자리는 없다. "신이 만물을 창조했다고 한다면. 신이 존재하기란 불가능 하다. 신의 존재 이전에 시간과 공간이 반드시 존재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중략) 우리는 '하나님'이라고 불러서도 안된다. 차연에 의해 변해버린 하나님은 데리다의 관점에서 우상숭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기도라는 행위 또한 무의미할 뿐이다." 차연은 신의 자리를 꿰어차게 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불가능하다. 앞서 말했듯이 차연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기에 어떤 특정한 개념도, 존재도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데리다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무엇인가? 진리를 찾고자 하는 것이 종교 행위이자 신앙함의 목적이라고 한다면 데리다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언어의 세계에서 초월하는 것 뿐이다. 이는 불교사상과 흡사하고, 결국 데리다의 사상은 동양 사상으로까지 확장된다.

데리다는 이 책을 통해 플라톤으로부터 지금까지 쌓아온 '서양의 지혜'들을 무너뜨린다. 그와 동시에 신을 소멸시켜 버린다. 우리가 진리라고, 옳다고 믿어왔던 모든 것들은 상황윤리에 지나지 않게 된다. 학자들, 기독교인을 비롯한 종교인들, 또 진리를 찾기 위해 투쟁하는 모든 이들에게 좌절과 허무를 선사해 주고, 자끄 데리다라는 한 철학자를 넘어야 할 거대한 산으로 인식하게 된다. 특히 유일신의 종교, 하나님 외에 다른 것으로 채울 수 없는 종교인 기독교는 그 도전에 정면승부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