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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예수 스타일의 정치란? - 예수의 정치학

by 더쇼트 2009. 9. 6.

예수의 정치학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존 하워드 요더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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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는 교회의 대형화와 그 권력이 목회자에게 집중되는 현상을 보이면서 교회의 정치 참여(좀 더 정확하게는 목회자들의 정치 참여)는 각계를 불문하고 하나의 담론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교회의 정치 참여에 대한 담론과 비판 작업이 오늘날에만 국한되는 논쟁거리는 아니지만, 진보신학의 정치성을 비판하던 보수신학의 교회가 근래에는 진보신학은 쇠퇴하여 정치성이 사라지고 있는 가운데 정치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반전된 현상을 보이고 있기에 어느 때보다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고 볼 수 있다.

교회의 정치성에 대한 정당성 논쟁을 위해서는 그 근거를 그 어느 자료들보다도 신약성서에서 예수에게 나타난 정치성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예수의 정치성은 그 유명한 오스카 쿨만을 비롯한 신약학자들과 리처드 니버, 라인홀드 니버 형제와 같은 기독교 윤리학자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였고, 그들의 연구를 통해 예수의 정치성을 주장하는 입장과 비정치성을 주장하는 입장 둘 다 나름의 근거를 얻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 요더가 연거푸 밝히듯이 요더는 어떤 새로운 이론을 전개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까지 신약학과 윤리학에서 진행되어 온 예수의 정치성에 관한 논문들을 정리하면서 자신의 논지를 굳히는 방향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 책 본문에 붙어있는 수 많은 주석과 각주들이 이를 대변하고 있다.

도입부에서는 예수의 비정치성을 설명하는 이론들을 언급한 뒤 그 다음 장 부터 복음서, 특히 예수의 정치성에 대해 좀 더 잘 서술하고 있는 누가복음을 차근차근 주석하면서 비정치성 이론들을 반박하기 시작한다. 요더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는 충분히 정치성을 띄고 있다고 말한다. 예수에게 정치성이 없었다면 로마 관리들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은 그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다만 그 정치성은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과, 열심당원들과 제자들이 생각한 폭력적 혁명과는 현저히 다른 비폭력주의로 나아간 것이다. 

예수에게도 폭력혁명의 기회는 있었다. 마귀의 광야 시험은 기존의 영적 해석과 달리, 예수의 신성을 시험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폭력혁명으로 초대한 것이었다. 성벽 끝에서 떨어지는 것은 당시에 신성 모독을 한 죄인에게 부여되는 처벌이었다. 예수가 떨어져서 살아남는다면 그는 공공연한 신의 아들로서, 유대인들의 메시아로서 군림할 수 있었고, 수 많은 추종자들을 끌어안을 수 있었다. 그가 왕좌에 앉는 것은 시간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것을 거부했다.

또한 예수는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가난에 굶주린 사람들을 먹였다. 이에 예수는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릴 수 있었다. 그 후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그 곳의 예배하는 성전을 접수하기까지 했다. 이제 수 많은 추종자들을 이끌고 로마 정권을 전복시키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예루살렘을 떠났다. 그 때부터 예수는 많은 사람들의 신뢰를 잃어버리게 되고 예언의 성취를 위해 십자가의 길로 들어선다. 요더는 이 모습을 '간디와 흡사'하다고 표현했다. 이 비폭력 평화주의야말로 후대들이 배워야 할 정신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당시의 십자가 사건이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인가? 그 비폭력 평화주의 정신이 그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라면 우리는 굳이 그것을 따를 필요가 없지 않은가? 요더는 이에 대해 바울을 그의 변호사로 내세우고 있다. 바울은 그의 서신서를 통해 예수의 가르침을 따를 것을 끊임없이 주장하였다. 또한 보수주의 신학의 훌륭한 무기인 로마서의 내용을 정확히 해석하려 시도한다.

보수주의 신학에서 주장하는 바는 바울은 '권세에 복종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구절에서 '권세'라고만 할 뿐 특정 권력을 지칭하고 있지 않다. 민주주의 정부도, 사회주의 정부도, MB 정부에 복종하라고 하지 않는다. 또한 그 권세가 정의롭다, 선하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신은 그의 역사를 위해 악을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에게 또한 정당성을 갖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이방 나라를 통해 이스라엘을 쳤지만 우리도 똑같이 할 수 있는 권리, 사람을 죽이는 행위에 정당성이 부여된 것은 아니다. 요더는 이 논증을 통해 전쟁의 정당성에 대한 논쟁까지 불식시키려 한다.

요더는 상기의 로마서 구절에서 '순종(obedience)'이 사용되지 않은 것에 주목하고 있다. 신약의 다른 부분에서는 어떤 것에 나의 의지를 꺾고 따르는 뜻을 지칭하는 헬라어를 많이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순종(obedience)가 사용되지 않고 특별히 복종(subordinance)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그 권세를 명령하시는(ordering) 예수의 가르침을 따를 것을, 십자가의 길로의 초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즉, 권세에 복종하는 것은 예수의 로마 권세에 대한 오래 참으심을 본 받으라는 것이다.

요더는 기독교 평화주의 - 요더 그 자신이 속한 메노나이트 공동체와 같은 - 를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가장 적합한 정치 형태로 이야기하고 있다. 다만, 이것이 단순히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어떤 정치권력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념 정도로 비하 되어서는 안된다. 진정한 기독교 평화주의는 죽음의 길,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실패'라고 간주되는 길이지만 그 길을 묵묵히 걷는 것 자체, 그 '실패'가 심지어 자신의 죽음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동참하는 바로 그 것이다. 바로 예수가 그랬던 것 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