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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신앙의 가장 큰 딜레마, 전능과 악의 사이에서 <과정신정론>

by 더쇼트 2011. 1. 25.
과정신정론
카테고리 종교 > 기독교(개신교) > 신학/기독교사상 > 신학일반
지은이 데이빗 그리핀 (이문출판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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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신앙에 대해, 그리고 신의 존재유무에 대해 한번쯤 진지하게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에 대한 물음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전통적인 신앙에서의 신 이해는 하나님은 전능하고 선하며 사랑이 넘치는 존재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언제나 상충되며 악에 대한 이해를 요구할 때에는 '하나님의 높은 뜻을 어떻게 알겠느뇨'하는 불호령과 함께 무시당하거나 '하나님은 모든것을 창조하시고 움직이셔. 그런데 하나님은 악에 대한 책임은 없어.'라는 비논리와 마주할 수 밖에 없다.

  데이빗 그리핀의 <과정신정론>은 크게 성서와 그리스 사상의 악 이해, 전통적 신정론, 비전통적 신정론으로 나뉜다. 이 세 부분 중 저자는 전통적 신정론을 소개하고 비판하는 데에 가장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아우구스티누스적 전통적신정론은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모든 것을 창조하셨으나 악에는 책임이 없는 존재이다. 다수의 사상가들이 소개되고 있고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궁극적으로 그들이 주장하는 바는 이와 같기에 가장 극단적이라 할 수 있는 칼빈의 신정론만 이해하더라도 핵심 주장과 그 허점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의 신정론에서는 우선 신은 모든 것을 예정하였고 그 예정대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역사는 흘러가므로 순수 악(이유없이 받는 고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신의 선함은 인간의 도덕적 기준을 초월하므로 인간이 악이라고 생각 할지라도 그것이 선이 아닌 것은 아니며 궁극적으로 선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며 지금 현재 당하는 고통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훈련의 과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 이해는 두 가지 결점을 드러낸다. 첫째로는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고,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한치도 오차없이 존재하고 있다면 왜 인간에게 악으로 오해되는 교정이나 훈련의 과정이 필요한지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하나님의 선이 인간의 선에 대한 기준을 뛰어넘는다는 언술은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선을 인식하지 못함을 의미하고 이는 하나님이 예배 받기에 적합하지 않은 존재가 될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 선한지 악한지 파악할 수 없는 존재를 어떻게 예배할 수 있겠는가? 

  아우구스티누스 전통의 신정론 외에도 이레니우스 전통의 신정론이 있는데 그 대표자 격으로 존 힉이 있으며 저자는 이를 집중적으로 비판한다. 존 힉의 신정론은 세상은 완전히 선만 존재하는 세상으로 창조될 수 있었으나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악이 존재하도록 하였다는 사실에서 기초한다. 왜냐하면 그 편이 더 가치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과 '관계'하기 원하시기 때문에 고통과 악이 있는 세상에서 인간 스스로 이들을 이겨내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하나님 입장에서 더욱 보람찬 일이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낸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히틀러와 같은 인물을 허용하게 한 세상이 완전히 선만 존재하는 세상보다 더 가치있다고 도저히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존 힉의 신정론 또한 아우구스티누스 전통의 신정론과 같이 하나님의 전능성에는 흠을 내지 않은 바, 그렇다면 완전히 선만이 존재하는 세계를 창조하면서도, 악이 존재하는 세계보다 더 가치있는 세계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과정사상은 이러한 전통적인 신정론의 모순점을 극복하는 신 이해를 제시한다. 이러한 배경에는 신은 어떻게든 인간의 이성에 맞게 이해되어야 한다는 뜻이 숨어있다. 그래야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정철학은 하나님을 초월하는 형이상학적 범주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은 '창조성', '다(多)'와 '일(一)'의 범주이다. 이것이 현실태(actuality)가 갖고 있는 보편적 특성이다. 또한 화이트헤드는 현실적 존재가 경험의 계기(occasion of experience)로서 무한이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순간의 사건들로 존재한다. 따라서 한 존재양식은 한 계기로서 경험하는 주체로 존재하고 그 이전의 현실적 계기로부터 느낌들(feelings)을 통합하여 통일된 주체로서 우선 존재한다. 이를 "합생(concrescence)"이라 한다. 또 합생의 과정이 완성되고 나면 받아들였던 이 통합된 경험이 곧 다른 주체를 위한 대상이 되어, 계기의 주체성은 소멸되고, 이로인해 계기는 객체성을 확보한다. 여건이 한 계기에서 다른 계기로 옮겨가는 과정을 "이행"이라고 한다. 또 계기는 자기-형성 안에 있는 활동이 타자-형성이라는 활동으로 옮겨가는 이중적 힘이 있다. 즉 현실적 존재는 자기-결정성과  타자-결정성이 혼합되어 있다. 

  이 세계는 이러한 이중적 힘을 지닌 현실태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나님 또한 현실태이므로 이러한 형이상학적 원리에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은 강제할 수 있는 힘이 원천적으로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힘은 설득적이다. 또한 현실태는 반드시 그 이전의 계기가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전통적인 창조의 의미가 아니라 혼돈을 질서로 바꾼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악의 문제와 이에 대한 하나님의 책임문제는 과정사상으로 넘어가면서 어떻게 되는가? 다시 형이상학적 원리인 '창조성'으로 돌아가서,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마저 초월하므로 하나님의 목적에 순응하는 것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그러므로 사실 선과 악이란 동일한 창조적 힘에서 출발하는 것이고 악은 부조화, 불일치를 의미한다. 이를 통해 미학적 기준이 도덕적 선악을 포함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악은 선으로 탈바꿈될 수 있다. 악은 물리쳐야 할 대상이 아닌 하나님의 설득을 통해 변화될 수 있는 대상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은 바로 인간의 도덕적 악 지향성을 설득을 통해, 선으로 극복하기를 유혹하는 것이다.

  과정신정론은 서론에서 언급하였던 전통적인 신정론이 가지고 있는 고질적 모순들을 대부분 극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훌륭하다. 무엇보다도 이 신정론이 강력한 것은 인간이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신 이해를 제공하여 준다. 또한 이 사상은 비전통이지만 여전히 예배받기에 합당한 신의 모습을 그리면서 '예배'라는 기독교의 종교적 끈을 놓지 않고 있다. 그러나 신이 설령 예배받기 합당하다 할지라도 그것보다 더욱 본질적인 차원에서, 과연 이 세계는 신을 필요로 하는가? 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하나님과 인간이 동일한 형이상학적 원리를 따르며, 하나님이 인간에게 강제할 힘이 없다면,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선한 목적은 인간만을 통해서도 가능할지도 모른다. 또 한가지 문제점은 하나님이 예배받기 합당하지만, 예배하기 위해 이해해야만 하는 하나님은 대단히 복잡하고 정교한 지식을 요구한다. 이는 성서만으로 도출해낼 수 없는 신 이해를 요구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는 하나님은 예배할 만한 존재일지 모르나, 종교적 실천에 있어서 하나님은 예배하기 불가능한 존재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