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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고전 of 고전!, 토마스 쿤 <과학 혁명의 구조>

by 더쇼트 2010. 6. 18.

과학혁명의구조
카테고리 과학 > 과학이론 > 과학이론/과학철학
지은이 토머스 S. 쿤 (까치,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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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토마스 쿤은 근대성으로부터 등장한 과학의 축적성과 진보성에 대해 패러다임이라는 것으로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논증한다. 과학은 뛰어난 과학자들의 업적을 통해 그 지식들이 쌓이고 쌓여서 전수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양립할 수 없는 패러다임들의 충돌을 통해 어떤 현상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패러다임이 승리함으로써 과학계를 지배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것은 과학의 객관성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출발한다. 패러다임이 형성되는 것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무작위적으로 관찰한 우연한 결과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전 사람들의 형이상학적 믿음, 혹은 다른 과학자의 관찰 방식과 결과 등에서 출발한다. 만약 과학의 발전이 가치중립적 상황에서 가능하다면 그 과학의 방식이란 어떤 특정한 것이 아닌 우연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이러한 상황에서 일정한 법칙을 지닌 결과가 등장하기란 매우 어렵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과학이 발전했다면 지금의 과학의 수준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쿤이 과학이 축적적이 아니라는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양립 불가능성이다. 두 패러다임은 같은 현상을 다르게 보고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둘은 충돌할 수 밖에 없으며 이에 승리한 패러다임이 정상과학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실제로 이것이 패러다임으로서양립하는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패러다임은 쿤도 시사했듯이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긴 기간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두 패러다임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실제로 패러다임이 이루어진 상태인가? 서로 다른 두 의견패러다임은 어떻게 다른가? 패러다임의 특성상 항상 그 패러다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후대에 의해 관찰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에서 과거의 어떤 두 의견 차이를 패러다임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해서 그것이 실제로 완결된 모습의 패러다임의 상태로 충돌이 일어났다고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현재에서 보는 과거는 어떤 것이 형성된 상태로 보일 수 밖에 없다.

패러다임이 형성되고 정상과학이 되기까지는 오랜 기간이 걸리기에 당대의 과학자들은 그 패러다임을 인식하기란 불가능하다. 또한 현재의 패러다임은 어떻게 명명할 수 있을까? 현재를 지배하는 패러다임이 다른 패러다임과 명확한 특성의 차이를 보여줄 수 있을만한 경계는 존재하는가? 지금 물리학계의 패러다임은 뉴턴의 패러다임인가? 아인슈타인의 패러다임인가? 양자역학의 패러다임인가? 아니면 뉴턴과 아인슈타인을 통틀어 고전역학의 패러다임이라고 부를 것인가? 쿤의 입장을 따라서 당대의 정상과학이 하나의 패러다임으로부터 도출될 수 밖에 없다면, 만약 현재의 정상과학을 지배하는 패러다임앞에 어떤 단어로써 명명하려 할 때 봉착하게 되는 문제는 산발적으로 존재하는 개별 학파 혹은 과학자 집단을 하나의 용어로 묶어버릴 수도 있는 모호함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한 이론이 정상 과학을 지배할 때 다른 과학자 집단의 실험실에서는 그 정상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관찰하고 연구할 것이고 그 이론에 대해 도전할 것이다. 그 이론은 또한 그를 자신의 이론에 근거하여 변호하려 할 것이다. 어떤 도전에 대해서는 성공적으로 방어할 수 있을 것이고, 어떤 도전에는 무력해질 것이다. 성공적으로 방어한 도전에 대해서는 하나의 업적으로 남겨지고 정상과학은 지속될 것이다. 또한 특정한 패러다임이라고 부르는 것들끼리 경쟁하는 동안 여전히 다른 실험실에서는 또 다른 관찰결과들이 나타난다. 패러다임들 간의 경쟁은 시간적으로 동일한 출발선에서 시작하지도 않으며, 어느 특정한 시점에 끝나지도 않는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이론들이 충돌하는 동안 다른 과학 활동이 행하여지지 않는다고 전제해야만 하고 그것은 매우 비현실적인 전제이다. 따라서 정상 과학과 패러다임은 완결된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정상과학의 패러다임이 완결된 형태로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과학의 축적성을 가리킨다. 여러 과학의 대립에서 하나의 과학이 승리함으로써 정상과학이 된다면 그 정상과학에 이르지 못한 과학은 철저히 배제되지만 그것은 실패한 데이터로서 남는다. 그 이유는 패배한 과학이라고 해서 과학이 아닌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들도 여전히 과학이기에 우리는 정상과학의 업적뿐만 아니라 과거의 여러 실패했던 과학들, 지금 보면 다소 황당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그러한 실험들에 대해 기억하고 있다. 현재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의 이론은 현재까지 설명되고 기억된다. 심지어 그의 이론 중 일부는 현재에도 제한적으로 강력한 이론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실패한 과학은 승리한 과학의 우월성을 더욱 빛나게 해주며 패배한 과학 그 자체는 하나의 데이터로 남는다. 정상과학에 도전하는 새로운 과학 실험실에서는 패배한 과학의 문제점을 더 보완해서 다시 다른 형태로 도전하든지, 아니면 최소한 그 패배한 과학의 방식대로 실험하지는 않을 것이다.

앞선 논의에서 과학에는 축적성이 있음을 시사했다. 이는 패러다임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이다. 그렇다면 쿤의 업적은 과학도, 그리고 과학자들도 가치중립적이지 않으며 그럴 수도 없다는 것을 지적한 점으로 제한된다. 그런데 이러한 과학의 특성은 과학이 진보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함축할 수 밖에 없다. 과학자가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은 그가 행하는 과학은 어떤 특정한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며, 과학자의 연구는 그를 둘러싼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과학이란 인간에게 봉사하도록 의도되고 유인되고, 그 의도는 인간을 둘러싼 모든 사회적, 문화적 환경에서 도출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을 전제로, 과학이 제공하는 것이란 인간의 자연지배력 향상이라는 근대성이 말하는 진보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그 사실 때문에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대부분의 페이지를 과학의 축적성을 비판하는 것으로 할애하지만 진보성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는 이유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